| 조회 : 1579 작성자 :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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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리 뒤낭 (Jean-Henri Dunant) |
| 1828.5.8 ~ 1910.10.30 | |
| ※ 생애
장 앙리 뒤낭은 1825년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깔뱅을 존경 하는 개신교신자였다. 앙리의 부모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곧 신분이 높은 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 했다.아버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 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힘썼으며,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 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YMCA(기독교 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활동하는 한계를 발견하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회사 (製粉會社), 즉 밀가루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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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에 참가했다. 이때의 경험은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렸는데,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없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적십자활동을 하느라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하여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였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하였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 ※ 업적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장 자크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제네바 공화국 대의원으로 제네바의 고아 수용소 자혜국장(慈惠局長)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안 앙트와 네트는 신앙이 깊은 칼뱅교도로, 그녀 역시 고아원 등에 대한 봉사에 힘썼다. 앙리 뒤낭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는데, 그는 제네바의 빈민촌을 찾아가 봉사 활동을 했으며 친구들을 모아 빈민구호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1852년 11월 3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된 기독교청년회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로 발전하였다.
1853년 스위스 뤼랑에소테은행에 입사하여 아프리카 알제리로 갔으며, 그곳에서 식민지 경영에서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뒤낭은 미개지역의 개발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을 꿈꾸며, 은행을 그만두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땅을 사들이고 제분회사(製粉 會社)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사업은 어려워지고 자금난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주변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사업이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거절 되었다. 1859년 궁지에 몰린 뒤낭은 알제리를 식민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결심을 하고, 북이탈리아 전선에 머물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나폴레옹 3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솔페리노의 격전에서 발생한 수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목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 목적을 제쳐두고 부상자 구호에 참가하였으며 이때 그의 인생이 사업가에서 사회활동가로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862년 그 때의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 Un souvenir de Solferino》으로 출판하였으며 그는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 적십자(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CRC)가 창립되고, 다음해인 1863년 10월 26일 유럽 16개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적십자(제네바)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적군도 아군도 아니며 이들의 활동을 방해나 공격해서도 안되고 중립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하고, 흰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를 새겨넣은 상징을 표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벌여놓은 그의 사업은 점차 악화되어 감당하기가 어려워졌고, 그는 모든 재산을 잃고 엄청난 빚더미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십자 조직의 내분이 일어나 앙리 뒤낭은 회장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최소한의 연금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1901년 박애 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1910년 10월 30일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채 스위스 하이덴(Heiden)에 서 죽음을 맞이했다.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그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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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자 : 2011-04-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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